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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음지맥 1 봉황산-어만각

조진대 2011. 6. 21. 11:01

팔음지맥 1 봉황산-어만각 (2011.06.18)


코스: 상현리(사재골)-봉황산-25번도로-황산마을-천택산-개티재-x584.3-어만각 거리 18Km(접근 2Km+지맥 16Km), 7시간13분 소요


누구와: 조은산님, 산타래님, 마눌과 나 (4명)


팔음지맥-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분기되어, 천택산, 팔음산, 천금산, 천관산, 쇠말봉, 깃대봉, 칠봉산을 거쳐 금강2교까지 이르는 거리 58.9Km의 지맥이다.

부산의 조은산님과 어만각(御挽閣)에서 07시 만나기로 하고 04시 집을 출발, 산타래님을 태우고, 경부,청원-상주 고속도로를 타고 화서IC에서 나가 화동면 평산리 평산소류지 옆 어만각에 06:30 도착, 준비해간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조은산님이 도착을 한다.

조은산님 차를 그곳에 두고 내차로 화서로 가서 상현리 사재골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맨 끝집에서 산행채비를 했다.

 

지도(지도를 클릭하면 확대됨


사제골(07:29)

시멘트 길 끝의 민가는 증축을 하느라 시멘트 바닥공사를 마친 상태에서, 정리 작업을 하고 있던 주인이 우리차가 올라가니 놀래는 기색이다. 이 집이 완공되면 앞으로는 100여m전 3거리에서 차를 돌리는게 좋을 것 같다.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차는 마눌이 타고 내려가 25번 도로 달천리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3명은 계곡을 따라난 등산로를 오른다.


길은 확실하게 나 있으며 계곡을 왼편으로 그리고 우측으로 건너서 완만한 오름길을 올라 출발 20분 만에 대간길에 합류했다. 대간길은 예나 지금이나 더 넓어지지도, 파손되지도 않았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풀이 젖어 등산화속 양말이 꿀쩍이고, 바람이 불지 않아 무척 덥다.


봉황산(740.8m)(08:12) 3각점

대간길을 20여분 남짓 완만하게 올라 둥근 의자와 정상석 그리고 3각점이 있는 봉황산에 와서 조망을 감상하면서 잠시 쉬고는 왼편으로 내려섰다. 약 150여m 가면 깨끗한 헬기장이 나오고, 5분여 더 가면 보도블럭을 걷어 한쪽에 쌓은 2번째 헬기장이 나온다.

이 헬기장에서 8분여 가면 묘가 있는 600여m의 봉에서 우측으로 팍 꺾이어 내려서고, 잠시 후 바위를 피해  우측으로 돌아서 능선에 붙으면 2-3년전 산불이 난 지역이 나온다. 많은 나무들이 죽어 서 있다.


09:01 안부에 내려서면 우측에서 오는 길과 합류하며(왼편에도 길흔적이 있음) 앞의 작은 봉을 향해 오른다. 5분여 오르면 443m정도의 봉인데, 오르는 도중 조망바위가 있어 우측의 마을이 잘 내다보인다.


25번 도로(09:24)

443m정도의 봉에서 확실한 길을 따라 한동안 가면 마루금을 우측에 두고 무동저수지로 내려선다.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상현2리“ 돌비석이 있는 25번 도로에 왔고, 우측으로 100여m 의 3거리에서 달천리로 들어가는 도로변에 서 있는 마눌과 합류했다. 여기서부터 황산마을 까지는 도로를 따르는게 편해, 차로 이동을 한다.


황산마을(09:50)

사산1리(황산길) 표지판에서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한동안 들어가면 마을 끝에 물탱크가 나오고 시멘트 길의 끝이 나오는데, 이곳에 차를 두고, 마루금은 우측에 떨어진 능선이지만, 계곡을 따라 오르기로 한다. 처음에는 길도 확실하고 리본도 걸려 있지만, 들어갈수록 길은 희미해지고 계곡이 끝나 능선으로 오를 때는 길이 없는거나 매한가지다.


천택산(683.2m)(10:44)3각점

계곡에서 오르는 도중 잠시앉아 쉬고는 10:38 능선에 붙었다. 오른 곳이 천택산을 지난 능선이기에 배낭을 벗어놓고 우측의 천택산을 다녀온다. 천택산 정상에는 작은 헬기장과 “관기 22, 83년 재설” 2등3각점이 있다. 정상에서 발길을 되돌려 마눌이 기다리는 능선으로 와서 잠시 쉬고, 한동안 내려서면 11:06 안부에 내려서는데, 좌우로 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안부에서 7분여 오르면 590m정도의 봉이고 왼편으로 꺾여 150여m 가서는 우측으로 꺾여 내려섰다. 한동안 내려가서 11:25 좌우로 길 흔적이 있는 잘록한 고개를 지나 다시 완만한 오름이 이어진다.


11:32 487m정도의 봉을 지나고 2분후 비슷한 높이의 봉을 또 지난다. 평탄하던 길을 지나 한동안 내려서면 묘지들이 나오고 딸기를 따 먹으면서 여유자작 내려선다.

 

지도(지도를 클릭하면 확대



개티재(11:50)

시멘트 포장을 한 넓은 개티재에 왔다. 왼편에는 밭들도 보이고, 길을 건너 왼편의, 밭으로 가는 수레길을 따라가서 산으로 들었다. 그런 후 적당한 자리를 잡아 점심을 먹었다(12:05-12:35). 점심 후 딸기를 따 먹으며 봉 하나를 우회하고, 12:50 467m정도의 봉을 지나서는 한동안 평탄하게 가다가 우측으로 휘어져 완만하게 오른다.


x584.3(13:16)3각점

묘 옆에 3각점이 있는 x584.3에 올라섰고, 3각점을 지나면서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섰다.

13:49 좌우로 길 흔적이 보이는 잘록한 고개를 지난 후 높낮이가 심하지 않게, 길은 왼편과 우측으로 휘어져 가면서, 14:04 좌우로 길 자욱이 있는 고개를 지난다. 이 고개에서 5분여 오르면 413m정도의 봉을 지나고 3분후 114번 고압선 철탑이 나온다.


어만고개(14:17)

고압선 철탑에서 400여m 가면 임도수준의 어만고개이다. 승합차 한 대 서있고,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5분여 가면 어만각과 평산소류지이다. 이른 시간이고 큰골재 까지라도 더 가려 했지만, 뜨거운 여름철 몸조심 하느라 산행을 마친다.


어만각에서 조은산님 차를 회수하고, 황산마을로 가서 내차를 회수, 화서를 거쳐 청산면 소재지로 갔다. 농협앞 하나로 마트에서 돼지고기 1Kg, 파, 그리고 막걸리 2병을 사고, 아이스케익을 하나씩 입에 물고는 몸을 씻으러 청산교 밑, 보청천으로 갔는데, 여건이 좋지 않아, 505번 도로를 타고 교평리 예곡교 밑으로 옮겨 보청천 탁한물에 몸을 씻는다. 막걸리를 홀짝대며 해가 들어가기를 기다려 200여m 하류로 가서 텐트를 치고 삽겹살을 구워 저녁식사를 했다. 조은산님은 술을 하지 않기에 산타래님과 막걸리 한 병 밖에 비우지 못하고 아깝게도 한병은 집으로 가져간다.

텐트또는 차창밖으로 달을 쳐다보면서 개구리 울음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한다.


김 홍길님의 어만각에 대한 글을 옮겨 적는다.


- 어만각(御挽閣)

화동면 평산리 덧질마을 입구 저수지 옆 산기슭 소모변에 위치한 2동의 각이다. 이 각은 조선 태종이 개국공신 신 유정에게 내린 만사를 목판에 조각하여 게시 보존한 곳이다. 그는 1349년(고려 충목왕 3년)에 출생하여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형조, 예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태종 때에는 여진을 소탕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리하여 그가 세상을 떴을 때 그 공을 찬양하고 그를 애석히 하는 정을 담은 만사를 지어 내렸다. 이를 보존한 각이다.

한 채는 맞배지붕이고 아래쪽 다른 한 채는 팔작지붕인데 모두 골기와로 한 칸씩이다. 단청이 화려하게 칠되어 있다. 담장은 튼튼하게 쌓이고 출입하는 솟을대문도 역시 맞배지붕이다. 이중 아래쪽 팔작지붕이 어만각이다.


- 신유정(辛有定)


1347(충목왕 3)∼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자는 득지(得止)이다. 광탄면 신산리에 묘가 있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 사람인데,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의 아들이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어, 남의 실수를 보고는 용납할 줄을 모르고 반드시 침을 뱉고 욕을 하였다. 한 집안 사람이 궁핍(窮乏)함을 알리면 안색을 엄정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모두 하루에 두 끼씩 먹는다고 속언(俗諺)에 말하지 않았는가. 걸인이 죽어도 남는 옷은 있다고 하니, 굶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되었다가 여러 번 옮겨 정용 호군(精勇護軍)에 이르렀다.

병인년에 충청도 도원수 이승원(李承源)을 따라 왜구를 쳤는데, 승원(承源)이 전진하기를 주저하니, 유정이 칼을 빼어 승원이 탄 말을 겨누면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원수(元帥)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도 적을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않으니, 국가에서 장수를 보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싸워야 합니다." 하니, 승원이 분격(奮激)하여 적과 싸워서 크게 이겼다.

또 남원(南原)의 싸움에서는 유정이 혼자서 말을 타고 적을 추격하다가 말이 넘어졌다. 그때 왜적이 유정의 배 위에 걸터앉아서 칼을 빼어 찌르려고 하니, 유정이 왜적의 불알을 움켜잡고 몸을 뒤쳐서 칼을 빼앗아 도로 찔렀다. 승원을 따라다닌 지 4, 5년 동안에 적과 싸운 것이 25번이나 되었는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니, 유정의 공이 많았으므로 용감하다고 이름이 났다.

그 후 병조 의랑으로 옮겼고, 정축년에 국가에서 각도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15진(鎭)의 첨절제사를 두게 되었을 때에 지혜와 용맹이 있는 사람을 뽑아 제수(除授)하게 되었는데, 유정이 맨 먼저 선발되어 이산진(伊山鎭) 첨절제사가 되었다. 무인년 가을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가 9월에 파직되었다.

황엄이 강을 건널 때 객관(客館)에 깔 자리를 빼앗아 사물을 싸는 자가 있으므로, 유정이 장사(壯士)를 시켜 주먹질을 하니, 그 사람이 울면서 황엄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유정이 황엄의 앞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유를 상세히 알리니, 황엄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도 무례한가." 하니, 유정이 관대(冠帶)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소방(小邦)에 의관(衣冠)을 내리시어 피아(彼我)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였는데, 지금 관인 등이 변경을 침요하여 멋대로 놀아나니, 이제는 의관과 예의로써 그들을 대우할 수 없습니다.

먼저 관인을 죽인 후에 내가 관인이 범한 것을 글로 써서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고, 나도 죽겠습니다." 하며, 눈을 똑바로 뜨고 급히 장사(壯士)를 불러 말하기를, "허리에 찬 칼을 가지고 오라. 먼저 한 사람의 머리를 베고 강을 건너가겠다." 하니, 황엄이 사과하기를,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드디어 울면서 호소한 사람을 매질하고는 술을 놓고 즐기다가 작별하며 말하기를, "변장(邊將)은 당연히 이와 같아야 될 것이다." 하였다.


경인년 봄에 야인이 경원(慶源)을 침범하여 병마사 한흥부(韓興富)를 죽이니, 국가에서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을 보내어 도원수를 삼고, 유정을 발탁하여 좌군 도총제로 임명하여 부장(副將)으로 삼아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11월에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옮겼다가 임진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였고, 갑오년에 평안도 도안무사가 되었다가 을미년에 병 때문에 사직하고, 한가로이 있은 지 10여 년 만에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향년 74세이었다.

부의(賻儀)를 내리고 무절(武節)이란 시호를 내리니, 강강(剛强)하고 곧게 다스림을 무(武)라 하고, 청렴함을 좋아하여 스스로 절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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