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산행/Fuji산

일본 Fuji산

조진대 2013. 7. 5. 10:25

日本國 富士山 登山 및 旅行 日記

 

다음은 년초 부터 계획해 왔던, 日本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박승남 동창의 협조로 성산회를 대표해서 日本國 富士山 등산을 한 것과 東京 및 大阪을 여행한 일기이다.

 

기간: 2000년 8월 11-8월 15일 (4박 5일)
인원: 8명 (김광주,형남식,민승돈부부,조래권부부) 및 일본에서 박승남 부부

 

8/11 日本 가는날

 

07:40 김포공항 2청사 2층 출국장, 6명(김광주,형남식,민승돈부부,조래권부부)이 집결완료, KAL Morning Calm Checkin Counter에서 재빨리 Boarding Pass를 받고는 바로 세관,Immigration을 수속통과, 면세품점에서 어제 구입한 오미야게(선물) 홍삼가격을 확인한다. 133,000원짜리를 $195.-을 붙혔는데, 담배인삼공사 구내판매점에서 구입한 가격이 무지무지 싸다. 우릴 맞기위해 몇달을 준비해온 박승남(일본명 MIURA상)에게 속마음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를 해줄 선물이기에, 요즘 이산가족 만날 때 50년만의 형제에게 주는 선물처럼, 비행기 안으로 가슴에 꼬옥 껴안고 들어간다.

 

09:40 KE 701은 이륙했고 10시에 아침겸 점심식사를 했다. 처음 비행기를 타는 남식, 학교때도 그랬지만 사전에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능갑다. 도쿄가 어떻고 오사카는 어디가 좋고...동해를 건너 일본의 남쪽을 지날 때 왼쪽 창으로 우리가 오를 후지산의 쾌청한 모습이 어서 오라는 듯 눈에 들어온다. 요코하마, 동경만을 거쳐 11:40 나리타 공항에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화장실까지 들른 나, 내마누라, 승돈 마나님(난 어디서나 여자반장)은 제일 뒤에서 이민국을 통과 했고, 승돈, 광주, 남식은 재빨리 앞서나가 벌써 짐을 찾아 우릴 기다리고 있다. 세관을 통과 하는데, 세관원이 과일, 뭐뭐, 소쮸가 있냐고 묻길래 난 속으로 "어어 남식이 소주를 30팩이나 넣어 왔는데" 하는사이 광주가 능숙하게 "난니모 아리마셍" 하니 통과. 出口로 나와 Miura 상을 만난다.

 

건물 밖은 쾌청한 날씨에 습기가 확 끼쳐 오는데, 온도는 서울이나 비슷했다. Miura상은 24인승 좌석에 뒤에 응접탁자와 3-4명이 앉는 로비를 갖춘 버스를 대절했다. 한 사람이 한자리씩 차지해도 반 이상이 남는 널찍함에 우선 이번 여행의 첫 느낌이 좋았다. 거기에다 일본식 안내 (일본 관광버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안내말을 조잘대고 할말이 없으면 노래도 불러준다)를 하는 Miura상-나와 군에서 만난 일, 성산회가 온다는 소식에 준비해온 일, 일본에서의 학교와 직장일 등등. 승돈과 광주는 그새를 못참아 소주타령.

 

고속도로를 타고 도쿄가 가까워지자 체증이 시작되고, 도쿄 시내로 들어와서 뉴오타니 호텔, 히비야 공원을 지나 일본 천황이 사는 황궁앞에 차를 잠시 세운다. 가지를 잘라내어 크는걸 억제한 분재 같은 소나무가 황궁입구 공원에 심어졌고 잔디는 잎이 작은 최상급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목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 길을 건너고 공원 자갈길을 한참을 걸어 황궁입구에서 기념 사진을 박고는 다시 버스를 타고, Miura의 회사가 있는 Akasaka에 들러 음료,빵,오니기리,삶은달걀,오싱꼬,맥주를 준비한 Miura의 부인을 태운다. 황궁앞 주차때 꺼낸 소주로 파티를 벌이는데, 소맥으로 무식하게 마셔대는 촌놈들 모습에 다물 줄 모르는 Miura의 입. 그래도 좋단다. 어릴적 친구들 노는 모습이 일본사람들 하고는 다르게 친근감이 있으니...

 

"中央高速道路"를 타고 후지산이 있는 "가와쿠찌코"로 향한다. 주위의 산에는 우거진 나무와 풀-일본은 기후가 습해 말뚝만 박아도 나무로 자란단다. 가와쿠찌코가 가까워 지자 맑은 날씨에 멀리 공기 엎어 놓은 것 같이 보이는 후지산, 난 그걸 바라만 봐도 가슴이 설레였다.

 

1合目을 지나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 17:30 2,000미터 5合目(엄밀히 말해 5합목반)에서 차를 내렸다. 우리나라 설악산 주차장 같이 박작대지는 않지만 몇 개의 주차장엔 버스와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주차해 있고, 날씨는 아래보다 시원하고 구름이 적당히 햇빛을 가려주어 산행을 시작하기에 좋았다. 주차장을 벗어나니 길가에 말들이 있고 돈을 내면 어디까지 태워주는 것 같다 (7合目 까지 1만2천엥).

 

등산로 주위에는 우리 산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나무와 풀들이 들어차 있다. 평지같은 넓은 길을 한참을 가니 6합목, 여기까지는 나무가 자라고 있으나 이후 부터는 작은 풀이 군데군데 있으나 그것도 7합목 부터는 없으며, 화산폭팔 때 분출된 용암석 조각과 돌멩이로 덮혀 있다. 6합목부터 산행이 시작 되는데 아직도 길은 소형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자갈깔린 길의 지그재그 오름이 서서히 시작된다 (고산병 증세를 극복시키기 위해서인지 10합목 火山크레타 까지 언제나 지그재그 오름이다).

 

6.5합목쯤 다다르니 머리가 띵해오기 시작한다-이게 고산병의 시작이다-난 유럽 융프라우(3,600미터)를 갔을 때 처음 느껴본적이 있어 금새 알아 차렸고 한국에 와서 일기를쓰고 있는 지금도 머리가 어질어질, 높은 나무위에서 흔들거리는 것 같다. 여기저기 흙이나 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아줄 구조물들이 서있는게 다리 공사장 기분이 난다. 19:30 첫 오두막집(한국의 산장 모습인데, 앉아서 식사를 하고 다른 칸에서 잠을 잘수 있는 옆으로 긴 주막집 같다. 화장실은 조금 떨어지고 이용때 100엥씩 받는다) 花小屋 (우리가 예약한집) 이 있는 7합목(2,700미터)에 도달한다. 머리가 띵하고 어질거려 더 이상 오르기가 쉽지않다.

 

56,000엥을 지불하고 등산화를 벗어 비닐 주머니에 담고 2층(가슴높이) 마루위 선반에 배낭과 신을 내무사열 때 처럼 가즈런히 얹는다. 잠자리 베게를 놓았는데 감방보다 더 좁게 어깨를 붙혀 누어야할 간격을 할당해 주며 3명이 함께 덮을 이불을 깔아준다. 승돈 이걸보고 기가 찬 모양이다. 아래층에는 벌써 몇 명이 제비새끼처럼 누어 우리 오는걸 쳐다보고 있고.. 옆방 식탁에 마주 앉으니 프라스틱 그릇에 오싱코를 조금 얹은 밥과 카레, 가져온 소주가 빠질리 없다.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소주빈팩을 버리려 하니 밥그릇과 물컵(日本酒병)만 가져간단다 (자기가 가져온 것은 자기가 수거).

 

야속한 인심에 눈물이 쏘옥 나올 지경. 좀더 앉아 노닥 거리니 불마저 탁 꺼버린다. 헐수 없이 화장실도 못가고 (세수나 이 닦을 물도 없음) 2층으로 기어 올라 입고온 차림 그대로잠자리에 든다. 난 승돈이 그게 제일 걱정 됐는데 베게가 얕으니 코골이도 없고...잠자리 타령으로 한숨만 쉬던 남식,승돈도 어느덧 잠을 청한다.

 

8/12 등산 하는날

 

새벽2-3시인가 보다. 밖은 계속해서 철그럭 거리는 등산객의 지팡이 소리(사람 키만한 나무로 만든 후지산 지팡이-合目을 지나면서 200엥을 내고 달군쇠로 火印을 받는다), 오두막집앞 간이의자에 앉아 피로를 풀면서 노닥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소피라도 보고 싶은데 일어나 사다리 내려가기가 싫어 억지로 참으며 잠을 청한다.

 

04:40 모닝콜에 잠을 깨서 어물어물 하다가 세수도, 용변도 못보고 도시락을 받고는 05:10 출발한다. 멀리 구름 위로 솟는 눈부신 해를 보고 증명사진을 박으며(이때 Sun Block을 얼굴에 발라야 했었다) 火小屋뒤로 다시 산행은 시작되고 200여 미터 가니 밤새 안정을 찾았던 머리는 또 어질 거리고, Miura부인은 구토증이 있다고 토해도 되느냐고 내 눈치를 본다. 살살 달래 조금 더 올랐으나 그 이상 못 가겠단다. 거기서 하산을 시키고, 7명은 계속 지그재그로 오두막을 지나면서 등산을 한다.

 

산아래 "가와쿠찌코"가 반달콩 모양으로 내려다 보이고 멀리 산들이 줄을이어 멀어져 간다. 오두막은 7-8합목 사이에 늘어서 있으며 그 앞을 지그지그로 지난면서 오른다. 넘녀 한패가 리더의 인솔로 10발작 걷고 5초 쉬는걸 반복하면서 오르는데 그게 힘이 덜들 것 같아 따라가 보지만 우리 마나님들이 못딸아 오니 자꾸만 뒤로 쳐진다. 대여섯 발작 다리를 움직이고는 "학학-이질어질" 물한모금으로 몸과 머리를 Re-fresh하는 동작이 반복된다.

 

8합목(3,100미터) 승돈부인이 못 참겠는지 쉬는 시간이 잦고 길어진다. 조그만 부탄깨스통 만한 산소통을 1,500엥에 구입 두 마나님들을 교대로 들이 마시게 하지만 마실때만 반짝 머리가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몇 발자욱 옮기면 다시 어질어질.

 

07:40 8합목 原組室 3,250미터, 정상이 1시간 50분 남았다는 팻말이 있다. 기온은 내려가 반팔 입은 팔뚝에 소름이 끼쳐와서 긴 팔을 꺼내 입는다. 새벽 나절 아래로 내려갔던 구름은 위로 올라오고, 그래서 그런지 울렁거림이 줄어든다. 08:25 3,350미터 승돈 부인이 더 이상 못 가겠단다. 물을 마시게 하지만 효과가 안나고 물 마시는 것도 귀찮아 지고 이대로 죽는게 편하겠다는 생각이 난다. 승돈도 한참을 고민하다 부인을 홀로 내려 보낼 수 없어 함께 하산, 아내 사랑을 몸으로 보여준다.

 

3,400미터 Fujisan Hotel을 지나 9합목위, 10시경 3,600미터 내 마누라도 탈진, 얼굴이 노오랗게 옆으로 꺼꾸러져 일어날줄을 모른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고개만 가로졌고, 마누라를 데리고 하산을 해야 할까, 돈들이고 온 보람이 있게 정상 까지 가야 할까 고민을 하다, 바람막이 화산바위 틈새에 몸을 웅크려 업드려 놓고 (반쯤 죽은 시체 팽개치듯) 무슨 大任을 띤양 등산을 계속한다.

 

길 옆으로는 日本의 젊은이, 아줌마들이 얼굴이 역시 노랗게 반듯이 눕든지, 옆으로 쓰러져 있던지, 앞으로 고꾸라져 있는지, 여기저기 널부러져 TV연속극 "허준"의 환자들 누어 있는것 같다. 어떤 사람은 구토를 억지로 참느라 고생을 한다.

 

10:20 드디어3,710미터 10合에 도착했다. 이제 부터는 평지다. 오르는 것을 멈추고 神社, 가게등이 있는 청진동 뒷길같은 거리를 지나 왼쪽으로 가장 높은 정상을 향한다. 구름에 가랑비가 오기 시작하나 지친 몸이라 배낭을 뒤저 우비를 꺼낼 기운도 없다. 10합에는 소,대형 불도져가 있는데,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Fujisan 용달차인 셈이다. 매 合目에 있는 오두막집들은 빗물을 받아 큰 통에 모아 사용하고, 화장실은 화학적으로 처리한다.

 

구름으로 완전히 가려 아래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고 부슬부슬 오는 비는 어느덧 위드쟈켓을 적시고, 이왕 젖은김에 우비 꺼낼 생각을 않하니 바지까지 젖어든다. 40여분을 平地 같은 길을 따라, NTT, 음식점을 지나 정상에 있는 기상 관측소 밑에 다달른다.

 

잠시 구름이 문을 열어주어 관측소를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박고는 지루한 마지막 오름(조그만 언덕 이지만 너무나 숨이 가쁘다)을 한 끝에 11:00 "日本國最高地點" 돌팻말 앞에 섰다. 앞을 바라보니 조그만 "頂上"이란 팻말이 있고 그걸 붸아 기상관측소 타워 중간으로 몸을 움츠려 오른다. 이 산행을 위해 미국에서 구입한 GPS는 이 지점에서 3,777미터를 가르킨다. 온도는 7.1도C, 오 하나님 드디어 우리가 정상에 올랐습니다.너무나 감개 무량하고 드디어 해 냈다는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떤다.

주위를 내려다 보지만 구름으로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웅크리고 쿡 쳐박혀 날 기다리는 마누라 생각에 더 지체할 수 없어 하산을 재촉 하다가 문득 下山酒 생각이 나서 배낭을 뒤져 하나 남은 소주팩을 광주,남식,승남,내가 나누어 마신다. 한국의 진로소주가 성산회의 등에 지워져 일본의 최고높은 지점에서 정상정복 축하주로 "대보지" 하고 외쳐졌다.

 

11:15 정상을 뒤로하고 왔던 길을 내려 오는데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옷은 몽땅 젖어 팬티까지 축축하고, 어제저녁을 먹은 이후 아침 점심을 모두 굶은채로 산행을 했으니 다리는 후들, 머리는 띵, 지루한 감은 이루 말할수 없다. 돈주고 하라면 못할 일이다. 단지 수십년 산행에서 익힌 忍耐力를 시험이나 하려는 듯, 一生의 最高點을 記錄 한다는데 목표를 두고 허기지고 어지러운 몸을 끌면서 끝까지 온 것이다.

 

 

구름속에 빠져버린 10합에서, 하산길을 옆으로 하고 올라왔던 길을 택해야 했다 (하산길은 곧장 뻗어 내려오며 자갈이 수북히 쌓여 빠지면서 미끄러 진다). 중간에 널부러진 마누라를 찾기 위해...

"도리"를 지나 50여미터 가니 그 자리에서 우비를 꺼내 뒤집어쓰고 웅크린 마누라를 일으켜 세웠다. 영화 "벤허"에서 쓰러진 문둥이 여동생을 잡아 일으키듯... 두어시간을 그대로 쉬어 기운은 살았단다.

 

비를 맞아가며 (그날 태풍19호가 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모든 오두막을 이리기웃 저리기웃, 혹시 지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승돈 부부를 찾으며 하산을 한다. 옷이 젖었으니 어디 앉기도 싫다, 쉼도 그대로 서서 쉬고, 단체로 올라오는 군중들이 지나가길 기다려 주며 (일본식 등산예절)

 

14:20 6합목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내려 오도록 승돈부부, Miura부인을 못봤으니 5합 주차장으로 간 모양이다. 하산길은 6합에서 등산길과 만나고 여기서부터 지루하게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15:00 주차장 입구에 오니 승돈 부부가 의자에 앉아 우릴 맞이하고 앞서 내려온 Miura는 버스와 마누라를 찾느라 왔다갔다...운전기사 까지 찾아서는 커피집에서 차한잔. 우린 그집이 기념품 집이고 기사가 손님을 안내하여 물건을 사게하고 기념품과 음료를 서비스 하는걸 몰랐다. 돈을 아끼느라 물건도 않샀는데, 커피를 서비스 하고 나중에는 기사편에 계산기 달린 "바인더"도 보내왔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산간도로를 타고 가와쿠찌코를 지난다. 빈속에 지침이 겹쳐 차멀미가 난다.

 

16:30 원조온천으로 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끈한 노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10시간 산행의 피로가 풀린다. 그때까지도 비는 부슬부슬..."하꼬네" 관광을 포기하고 정해놓은 여관이 있는 도쿄로, 아직도 풀리지 않은 고산병인가 ? 어지러운 머리를 뒤로 젖혀 누어 "東名高速道路"-"首都 高速道路"를 타고 東京大 부근 옛것을 고집한다는 동네에 있는 "旅館"에 들었다(호텔보다는 여관에서 일본 냄새를 더 느낄 수 있겠기에 Miura에게 부탁을 했다).

 

8시 저녁을 예약 했지만 도로 사정에 8:20 도착, 바로 일본식 저녁을 시작한다. "니혼슈"와 맥주를... 3개의 다다미 방에 나누어 들었다. 일본식 방은 동쪽에 창을두어 밤이면 달이 비추고 새벽이면 창이 밝아와 잠을 깨는 抒情的인 배치인데 이 여관도 그렇게 창을 두고 희미한 불을 창밖에 켜두어 달빛이 비추는 듯 演出 시켰다. 비로 젖어버린 등산화며 옷가지 들을 방 여기저기 널러 말리며 잠을 청한다. 이날 Fujisan에서 2명이 심장마비로 죽었단다.

 

8/13 도쿄 시내 관광

 

후두둑 거리며 내리붓는 빗소리에 새벽잠을 깨어 일찌감치 목욕을 하고 짐을 챙긴다. 유다까 차림으로 별도의 방에 마련한 일본식 아침식사에 밤새 남식이 만 듯 매실주를 딸아 반주로 하며 3공기나 비웠다. 9시 비가 오는 골목을 우산을 받고 나가 버스에 올라 신주쿠 도청건물 45층에 갔다. 태풍은 계속되고 구름은 잔뜩 내려 앉아 30여층 이상은 안개속이다. Miura가 왔다. 어제 등산으로 귀 뒤는 화상을 입어 물집이 터졌고 얼굴은 화끈 거린단다.

 

매년 3.1절 기념 동아마라톤에 참가 했는대, 평지를 뛰는것과는 또 다른 인내를 요하는게 산행 이란다. 처음 산행으로 그높은 곳을 오른 Miura의 체력에 감탄했다. 사진으로만 저기가 어디요, 그곳이 저기요 안내를 받고는 옆의 "수미토모" 건물을 돌아보고, 한국 사람이 나리타 공항에 내리자 마자 직행 한다는 카메라 전문점 "요도바시"에 갔다.

 

마누라가 코끼리 밥솟 애기를 꺼낸다. 俗物들 처럼 사고는 싶은데 남편은 그런걸 싫어하고, 보채지는 못하고 눈치만 본다. 언제 또 마누라와 旅行할 機會가 있겠는가, 에라 마음으로 나마 행복하게 해주자, 남들은 50년 만에 만난다는데...밥솟을 19,300엥 카드긋고 샀다. 승돈은 큼지막한 손목시계를 하나.. 그리고는 "신주쿠 3초메"를 우철에게서 들었단다. 유명한 곳이니 들러보라고...짜슥 아르켜 줘도 못된것만 아르켜 주고...점심식사를 한다. 돈까스, 라멩등에 니혼슈를 곁들이고, 국회의사당 부근 Capital Tokyu Hotel (5-star)에 체크인 했다. Miura가 거래하는 일류 호텔인데 파격적인 가격으로 예약했단다. 호텔 카운터에서 오조환상은 않왔냐고 ? 방을 정해 놨는데...

 

銀座로 갔다. 주차가 않되어 버스는 돌려 보내고 "미시코시" 백화점으로 들어가 마나님들 화장품(여자는 자기 화장품, 가전제품, 자기 옷치장 그다음에 아이들, 그리고 남편 것을 챙긴다)을 산다. 오늘 처음으로 일본에 온 의의을 찾았다는 마나님들 표정들. 거리를 건너 "마쑤자카야"를 지나 어느상가 지하로 가서 등산용품을 보지만 맘들어 하는게 없고, 식품점에 들어가 누구는 "기꼬망 간장"과 튜브에 들어있는 "와사비"를 사서는 이제 인천 앞 바다에서 생선회만 사면 된단다.

 

다시 버스를 타고 메이지 신궁(明治神宮)에 갔다. 길에 익숙치 않은 Miura, 우릴 V자형으로 한참을 우회시켜 神宮에 안내 한다. 년초 양력 설날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인파가 너무 많아 폭 20여미터 길을 가득 메워, 지체된 고속도로에 차가 찔끔거리듯 장시간을 움직여 신궁앞에 와서는 합장을 하고 5, 50, 500엥 동전을 던져 행운을 기원한단다.

 

다시 버스로 이께부끄로에 있는 호텔로 와서 Miura 부인도 합석하여 소고기,술 무제한 서비스 하는 한국식 저녁식사를 했다. 산행 후 노천탕을 함께하고 저녁을 했으니 마누라들 끼리도 말은 안 통하지만 몸짓으로 웃음으로 대강짐작 의사통화가 되능갑다. 까까닥 거리며 자기들 끼리 놀게 되었으니 마누라도 國際淑女가 되었나 보다. 이호텔 사장을 Miura가 명예전북도민증을 만들어 주었단다. 그래서 사쵸상이 한국식을 많이 하라고 종업원들을 닥달 한다나 ?

 

승돈이 또 신주쿠 3초메 타령을 한다. 할수 없이 Miura 부부가 안내를 해서 (아무데나 잡아끄는대로 갔다간 크게 바가지를 쓰고 망신을 당한다고 겁을 팍준다) 신주쿠 거리를 이리저리 배회하다 아는사람 소개로 노래방으로, 거기서 한국식 노래방 파티를 2시간이나 안나오는 노래를 깨액깨액 불러댓고 Miura 부인으로부터 과자를 선물 받았다.

 

호텔에 돌아와 맥주로 또 일배, 승돈은 여기세 헤까닥 갔는데, 여권을 잊었다고 광주보고 신고해 달라고 졸라대다 부인에게 혼쭐 (부인에게 준걸 잊고..)

 

8/14 오사카로 가는 날

 

07:00 호텔에서 나오는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Miura가 왔다. 모든 계산을 마치고 Miura의 안내로 도쿄역으로...(연속되는 휴일이라 역과 연결통로는 사람이 북적대지 않았다). 거기서 13,950엥을 주고 신오사카역 가는 "신칸센"표를 사고 눈물 글썽이는 Miura와 떨어지기 싫은 이별을 했다. 나도 눈물이 나올까봐 얼른 고개를 돌려 앞장서 들어가서 뒤돌아 보지만 Miura는 갔는지 서있는지 인파속에 없어져 버리고... 플렛홈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며 어제마신 덜깬 술을 푸느라 150엥 짜리 냉수만 벌컥 거린다.

 

09:21 도쿄역을 서서히 출발하며 속도를 내는 신칸센 의자뒤로 머리를 른혀 살짝 잠을 자고 나니 우측창으로 Fujisan이 맑게개인 하늘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잘가라고 인사 하는 것을 느꼈다. 몇 년전 남정일 초청으로 운문산행때 새마을호 내에서 술 마시며 떠들고 가다 "나이살 먹은 사람들"운운 욕먹은게 생각나서, 일본에서도 그러면 혼나고 열차에서 쫒겨 날거라고 겁을 먹고 입다물고 있으려니 승돈왈 "저 짜슥은 뭐 저리 겁이 많아 남보고 떠들지 말라고 지랄이야 ", 맥주로 해장을 하면서 조금 지껄여 대다가 제풀에 지쳤는지 조용해 진다.

 

두 마나님들은 뒷자리에 따로 앉았는데 옆자리 여자가 아예 담배갑을 꺼내 줄담배 피는 통에, 앞에서 끄면 옆에서 피고, 옆에서 끄면 뒤에서 그리고 앞에서...나도 오사카에 내릴때쯤은 목이 칼칼했다. 정신이 없는 통에 禁煙席을 사지 못했다.

 

나고야, 교토를 거쳐 12:17 신오사카역 도착, 택시로 Kita-Hama역(미시코시 백화점앞) Lions Hotel에 체크인 한다. 이제부턴 Miura 없이 우리끼리 찾아 다녀야 하는데, 술로 속이 뒤집힌 승돈, 따로국밥이 먹고 싶다지만 아무리 일본에 자주 온다는 광주라도 금방 따로국밥집을 어디서 찾으랴. 옆의 남식은 "도톤부리가 좋대" 하고 보챈다. 어린것들...

 

날은 무덥고 흐리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는 지도를 보고 방향을 물으며 지하철을 타고 "오사카성"으로, 성 주변 공원 숲속엔 천막들이 들어차 있는데, 소위 일본의 노숙자들... 광주왈, 일본은 남자들이 이혼 당하면 모든걸 아내에게 빼았기고 저렇게 밖으로 나와야 한단다. 그말을 듣고 나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이지는 말아야지 하는 마음속 다짐을 한다.

 

성안으로 들어서니 물오징어 굽는 연기와 냄새가 나는 간이매점이 나오는데,

그동안 굶주린 배가 냄새는 아랑곳 없이 우릴 주저앉게 만들었다. 맥주로 속을 풀면서 라멩과 우동으로 점심을...왜 이런 팔자가 됐냐고 승돈의 씨부렁은 계속되고...오사카 성을 돌아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貶下하고, 출구에 있는 천막촌을 다시 돌아보며, 남식이나 승돈, 쫒겨나면 대형 냉장고 포장박스하나 얻어 이런곳에 머물자고 서로를 위안한다.

 

지하철로 "니혼바시"역으로 나와 재래시장과 지하상가를 어슬렁 거린다. 두어시간을 걸으니 시장도 하고, 길거리 "야끼도리" 냄새를 붸아 간이식당 2층으로 올라 엉덩이 하나 겨우 끼어앉아 1인용 "야끼니꾸"(까스버너위에 재떨이 크기 불판을 얹었는데 산에 가져가면 딱 맞게 생겼다), 280엥 김치, 두부, 김치볶음을 안주로 맥주를...

 

간조가 너무 많이 오를까봐 이집을 나서서 저녁 식사할 곳을 찾는다. 다시 승돈은 "따로국밥" 타령... 어느 한식집 앞에서 견본 음식을 돌아보며 국밥, 비빔밥 등을 골라서 들어가려 하나 아직 이른 시각, 시장에 가서 스시와 회나 사가지고 호텔방에 앉아 간단히 먹자고 아까 들렀던 시장으로. 自販機에서 맥주를 사가지고 낑낑대고 지하철로 호텔에 오니 층마다 맥주 자판기.

 

적은 음식을 갈라 먹으니 맛은 좋고, 남식은 또 "도톤부리 가면 좋은데" 한방 쓰는 광주에게 은근히 보챈다. 처음 나왔다니 영수증을 보면 과거 경력이 자꾸나와 세금은 얼마요 몇%라고 계산해보고, 안 가본데 없이 다보고 싶으니 그맘 이해가 간다. 마나님들만 두고 가자니 왜 그러냐고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이고, 같이 가자니 은밀히 즐길 수가 없고 進退兩難, 일단 가 보자며 택시로 "도톤부리 이꾸요 ?" 애들만 박작대는 거리를 걷자니 좀 쑥스럽다. 머리 염색하길 잘했지, 허연 머리채로 왔다면 입구부터 딱지 맞았을 꺼다.

 

건물에 움직이는 게 인형을 크게 걸고 4-5천엥에 원없이 잡숫게 하는집, "다코"말이를 사 먹을려고 몇십 미터 줄지어 섰는 군상들, 몇 명씩 조를 이루어 머리에 노랑 파랑 염색을 하고 떠도는 젊은애들, 손님을 부르는 서양여자 삐끼, 승돈이 빠찡코를 하고 싶다고 천엥을 달라니 들은체 않하는 승돈 마나님, 하도 불쌍해서 손에 슬그머니 쥐어주니 좋다고 빠찡코 집으로...

 

아이스크림, 차를 파는 "미세"에 들어가 광주가 한잔 사는데, 거기서 승돈은 실수를 했다. 지나는 말끝에 "늙은게..." 운운 했는데 승돈부인 너무도 서운해서 톨아 졌겄다, 그날밤 우린 승돈이 방에서 차여 밖으로 나올줄 알고 남식-광주 방 한쪽을 치워 놨었다. 오사카에서 라도 코끼리 밥솟을 살려고 마음 먹었는데 사지도 못하고 속상하는 말만 해대니 아무리 마음넓은 마나님이지만 화가 않나랴 ? 호텔로 와서는 또 맥주. 승돈 부인은 더더욱 화가 났다.

 

8/15 집에 가는 날

 

07:15 호텔2층에서 집에 가는 날 이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바이킹식 아침을...중국집 춘장이라고 거들떠 보지 않다가 김 절임이라고 하니 한숫가락 푹-, 단촐한 손님에 마음껏 식사를 하고는 체크아웃.

 

쾌청한 날씨에 기분 좋게 택시를 탔다.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앞차에 광주와 승돈부부, 뒷차에 남식과 우리부부. 기사에게 "Kansai Goko Yookino 리므진 터미널 오네가이" 했더니 터미널이 두군데 인데 어디냐고 ? 그래서 우린 각각 다른 터미널에 내렸다. 기사 말씀이 일행을 못만나면 공항에 가서 만나란다. 어찌하랴 그럴 수밖에, 그러나 문제는 내가 표를 몽땅 갖고 있고, 광주 일행이 우릴 한없이 기다릴게 눈에 선해 발만 동동 굴렀지만...

 

일단 Kansai공항으로 가자 하고는 리무진 표를 1,300엥에 끊었다. 1시간을 달려 공항에 와서 KAL체크인 카운터로 갔으나 아직 오지를 않았고...50여분을 기다려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시간 동안 졸인 마음은 피를 말리게 했고...

 

면세점에서 승돈은 코끼리 밥통 찾는 마나님에게 대신 많은 화장품을 사주고서야 겨우 용서를 받을수 있었다.

 

며칠동안 사업을 전폐하고 우리와 함께한 Miura (박 승남) San에게 다시 감사를 드린다.

 

일기작성: 조 래권 (Fred Cho)